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2017. 8. 3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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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騎士團長殺し)



<후기>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스포주의>








2017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총 2권으로 되어있다.


 




1권 : 현현하는 이데아 (れるイデア)



- 한밤중의 방울소리에 이끌린 주인공과 멘시키가 함께 파낸 정체모를 구덩이.


  그 속에서 발견된 방울을 따라 나온 기사단장(이데아).


  





2권 : 전이하는 메타포 (遷ろうメタファ-)


- 기사단장(이데아)의 희생으로 불러낸 긴얼굴(메타포).


  긴얼굴(메타포)이 나타난 공간을 통해 이어지는 주인공의 여행.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같은


라틴 아메리카 소설에서 유행했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양식이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많이 보이는 듯 하다.



<1Q84>에서 나왔던 두개의 달이나 공기번데기.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의 실체화된 이데아, 메타포, 無와有의 틈새 세상...


예전의 작품 <해변의 카프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늘에서 생선이 비처럼 떨어지던 것이 기억난다!!)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 같은


현실에서는 없을 법한 이런 존재나 사건들이


때로는 독자들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어렵다"라는 거리감을 주기도 한다.




"두 개의 달이란 뭘 의미하는 걸까?"



"기사단장(이데아)의 존재는 뭘 뜻하는 거지?"



뭐.. 이런 식으로...



왠지 작가가 의도한 이 은유들을 알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자책감이 들고,


이 소설을 읽었다고 어디가서 얘기하기도 쫌 뭣해지는 것이다.





나도 나름 "이것들이 의미하는게 이걸까?"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 정답은 아닐 것이다.


난 문학적 소양이나 깊이가 많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난 이럴때 속상해하지 말고 이해가 안되면


"그냥 스토리만이라도 즐기자..."라는 주의다.


이해가 안되는건 넘겨버리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재미의 한 요소가 된다.

 



얼마전 알쓸신잡이라는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


소설가 김영하씨가 이런 내 생각에 힘을 보태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6화에서 나왔던 에피소드였다.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작품이 교과서에 실릴뻔 했는데


김영하 작가가 거부를 했다고 한다.


그 이유중 하나는 단편소설의 한 단락만을 싣게 해서


작품이 왜곡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작가의 멘트로 살펴보겠다.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김영하 작가의 생각에 난 매우 감동 받았으며


격하게 공감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답을 찾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여기서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회 현상은?


근데 실은... 문학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 보는 거지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라던가...


이런거를 찾기 위해서 하는 보물찾기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작가는 그런 걸 숨겨놓지 않습니다.


찾아봐라 ~ 이러면서 주제를 숨겨놓고


독자들과 그런 게임을 벌이지 않아요.



우리는 독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감정을 발견하고...


아니면 타인을 잘 이해하도록 하는거에요.



다양한 감수성을 개발 하는데에 문학작품이 쓰여져야 하는데


(줄을)긋고 ... 답 맞추고... 이런식으로 가선 안된다..


그런 취지로 싸우다가 (작품을)뺐는데...



저도 작품이 통째로 실리거나 따로 부록으로 나가는 방식은 좋고...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쓰게 하는거죠... 이상적인 교육은.


이 소설을 읽고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만 하면 돼요. 


자기 감상을.


그런 식으로 문학교육이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죠.




어떤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우리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지도 몰라요


.....중략


그런 다양성을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 건데


한국의 국어교육은... 뭐 다른 교육도 그렇지만


정답은 정해져 있고 너네들은 그 정답을 빨리 찾아내야


똑똑한 학생이라고 하는거죠.



근데... 그럴순 없어요.


실제로... 시인들이 문제풀고 틀려요... 자기 시.


시인들이 자주 하는 얘기에요.


.... 중략



작가의 숨은 의도 찾아내기, 출제자의 숨은 의도 찾아내기...


왜 정답이 있다고 믿고 찾아가나... 했더니


이건 저의 그냥 추정인데...


우리나라는요... 윗사람이 모호하게 말했을 때,


그 뜻을 알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생존에...


그게 목적이라면 문학교육은 잘하고 있는거에요..."




김영하 작가의 이런 이야기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그동안 학교에서 해왔던 국어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뭔가 숨은 주제나 작가의 의도를 찾기 힘들다고 느껴지고,


은유가 많이 보이는 것 같은 소설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거부감이 생기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아는 동생 하나가 1Q84를 읽으면서


"너무 어려워요..."


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잡설이 길어졌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 소설로 들어가서 몇가지 끄적여 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






주인공 - 36세 남자, 화가. 마흔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님. ㅎ


얼굴없는 남자 - 메타포에 의해 들어간 세상에서 강을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 얼굴이 없음.


아마다 마사히코 - 주인공의 대학 친구 (갈곳없는 이혼한 친구(주인공)에게 집을 제공)


아마다 토모히코 - 유명한 일본화 화가. 마사히코의 아버지.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장본인.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감. 덕분에 주인공이 이 화가의 집에 머물게 됨.


유즈 - 주인공의 아내. 


        잘생긴 남자에게 약함.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이혼을 고함.


와타루 멘시키 - 마사히코가 제공한 집의 이웃. 돈많고 잘생기고 매너좋은 정체불명의 사내.


아키가와 마리에 - 멘시키의 딸일지도 모르는 이웃소녀. 어린나이 답지않게 말이 없고 신중함.


아키가와 쇼코 - 마리에의 고모. 독신. 아름답고 옷 잘입고 다니는 노처녀.


고미치 - 어렸을때 죽은 주인공의 여동생.


마쓰시마 - 주인공이 알바를 하는 그림교실 관계자. 마리에와 주인공의 가교 역할.


아마다 쓰구히코 - 아마다 토모히코의 동생. 전쟁에 끌려 갔다 돌아와서 자살함.

                     

                     난징학살의 가해자이자 피해자.


아키가와 요시노부 - 마리에의 아버지. (친부는 아닐지도 모름)


유부녀 여자친구 - 주인공의 정서적,육체적 도우미(?). 어느정도 정보원의 역할도 수행.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사내 - 여행에서 마주친 의문의 사내.


기사단장(이데아) 


긴얼굴(메타포)


이중메타포


돈나 안나


무로 - 주인공의 딸. (주인공의 친딸이 아닐수도 있고 친딸일수도 있는 아이)





얼핏보면 많아 보여도


이야기를 끌고가는 중심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주인공과, 마사히코, 멘시키, 마리에, 기사단장(이데아) 정도일까? 


나에게는 이것이 하루키 소설의 좋은점 중 하나인 것 같다.


소설을 읽다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지면 나중에 헛갈려서


앞으로 가서 다시 찾아보기 일쑤인데,


하루키의 소설은 그렇지 않아 일단 읽기가 편하다. ㅎ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화가였다.


재능은 있지만 아직 꽃 피우지 못한...



안타깝게도 예술가에게 고난이란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이별, 미지의 존재와의 만남, 힘들고 신기한 여행을 겪어가며


주인공은 의미있는 작품들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저 기술적으로만 그리는 초상화로 먹고살던 화가가


스스로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는건 매우 중요하다.



돈을 많이 벌고 못벌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보람과 만족감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주인공의 아내 유즈는 어쩌면...


단순히 바람이 나서 이혼을 요구한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자기 작품을 그리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거나


나중에 주인공이 의미없는 삶을 살다가


유즈에게 그 탓을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특이하게도 주인공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야


"어랏! 주인공 이름이 뭐였지..???"


하고 다시 찾아보고 알았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것들





하루키의 소설들들 읽다보면 다른 작품들간에 공통점이 있다고 느껴질때가 있다.


예를들면 등장인물들의 차림새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음악 이야기 같은것들...


음악은 특히 재즈와 클래식이 자주 나온다.


아마도 작가 본인이 패션에 관심이 있거나,


(묘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공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음악은 즐겨듣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재즈를 좋아한다는건 이미 밝힌적이 있다. ㅎ)



패션에 관심도 없고 문외한인 나는


그런 하루키의 세세한 묘사를 읽어도


도대체 어떤 차림이라는 건지 상상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음악은 찾아서 들어보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옷과 신발의 종류를 찾아보는건 항상 귀차니즘에 지고 만다.



그리고, 차의 종류가 꽤 자세하게 나온다.


예를들어


"여자친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몰고 돌아갔다."


가 아니라


"여자친구는 자신의 빨간 미니를 몰고 돌아갔다."


이렇게 차의 종류와 색상까지 가급적 묘사하는게 특징이다.


어쩌면 차는 그 차주의 성격이나 재력등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나온 차들을 나열해보면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


미니(BMW) 레드


푸조 205 해치백 레드


볼보 구형 해치백 블랙


코롤라 왜건 파우더블루


재규어 스포츠 쿠페 실버


닛산 인피니티 리무진


재규어 E타입


토요타 프리우스 블루


등등이다. 



그리고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오전에 작업을 하고, 오후에 볼일을 보고...


밤에는 늦지않은 시간에 잠을 청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림들





[기사단장 죽이기]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작품이다.


아마다 토모히코의 숨겨진 작품.


주인공의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토모히코는


미술계에서 유명한 일본화 작가이다.


원래 서양화를 전공했었는데 젊은시절 유학중이었던 빈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연인과 동료들을 모두 나치에 잃고,


홀로 살아남아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 후 일본화로 전향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귀국후 군대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동생 아마다 쓰구히코가


자살을 하는 등 말도 못할 아픔을 잔뜩 지닌 인물.


그러한 고통속에서 태어난 그의 최고의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는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채 그의 집 다락방에 감추어져 있다.


이 그림을 우연히 주인공이 발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멘시키의 초상화]


비교적 유복한 고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그럭저럭 먹고살던 주인공.


멘시키의 의도적인 접근에 의해 초상화를 그리게 되지만,


그동안 그려왔던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게 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 의뢰자인 멘시키도 무척 만족해 한다.


슬럼프에 빠진 주인공에게 다시 자기그림을 그리게 해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값으로 멘시키에게 돈도 많이 받는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


멘시키의 제안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인연을 맺게된다.


소설의 진행에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작품이었다.


결국 미완성인채로 마리에에게 전달된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초상화]


유즈와의 이혼후 방황하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남성의 초상화.


주인공 심연의 부정적인 존재로도 표현되었던 것 같다.


이 남성은 그림속에서 자신의 초상화가 완성되는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주인공은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하여 결국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게 되는데,


아키가와 마리에는 이 그림을 보고는


이 자체로 완성된 그림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견을 낸다.


주인공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잡목림 속의 구덩이]


아키가와 마리에의 그림을 그리면서 같이 진행한 풍경화.


기사단장이 풀려난 장소이기도하고,


주인공이 마리에를 구하기 위해 자처했던


기묘하고 고된 여행의 탈출장소가 되기도 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위적인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소설속에 나온 이 그림들은 대부분


작가가 자세하게 묘사를 해주기 때문에 어느정도 상상이 된다.


하지만 역시...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기때문에


작가의 마음에 차는 일러스트를 삽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대작이라는 작품설정 때문에


재현하기는 불가능했을까?








 

이 소설에서 언급된 민감한 이야기





하루키는 시사적인 문제중 민감할수도 있는 것들도


소신껏 의사를 밝히는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2차대전때 피해를 입었던 피해국들에 대해서


"상대방이 됐다고 할때까지 사과해야 한다."


라던지...



"역사는 국가의 집합적 기억이기 때문에 과거의 일로 잊어버리거나,


슬쩍 바꿔치거나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후에 태어났다고 해서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책임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라던지...



이 소설에서도 언급된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학살된 인원에 대한 논란이 일자,


"(학살은)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40만명이든 10만명이든 차이가 무엇이냐?"


라고 발언했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런 하루키에게


중국에 잘보여 노벨상을 타려고 한다고 비난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극우의 모습은 참 많이도 닮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몇가지 발언만으로 하루키가 진보인지 보수인지,


국수주의인지 이타심이 있는 사람인지


이렇게 판단하는것도 성급할 수 있겠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소신있고, 배려심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를 흐뭇하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PS.


어떤 신문에서 이 소설과 하루키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읽었다.


소설속 난징학살에 관한 이야기로 하루키가 바른 역사관을 지닌 의식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분위기에 대한 반론이었다.


이것을 읽고나서 해 보았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도 조금 적어본다.




<기사링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4598.html#csidx248c55d0c3268f9a63a3a82f27d3840



<기사발췌 - 한겨레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하루키의 역사관과 문화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지난 4월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일본 우익들은 하루키를 매국 작가라고 비난했다.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난징 시내를 점령하고 대량 살인을 자행했습니다라는 소설 속 한 인물의 발언 때문이었다이런 소설 내용과 그에 대한 우익의 반발이 알려지면서 하루키는 균형 잡힌 역사관을 지닌 의식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분위기였다그런데 그런 평가는 올바른 것일까. 

 

<기사단장 죽이기>는 주인공이 몇 달간 머물게 된 산속 저택의 주인인 늙은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숨겨 놓았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둘러싼 수수께끼와 모험을 다룬다아마다는 1938년 오스트리아 유학 당시 나치 요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연인을 잃고 강제 귀국 조치를 당했으며그의 동생인 음악가 쓰구히코는 난징학살 때 명령에 따라 포로의 목을 베어야 했던 트라우마로 자살을 택했다청년이 노인을 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을 담은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런 일들을 겪은 아마다의 상처와 분노그리고 역사의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이 그림은 소설 말미에서 저택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불타 없어지고 마는데그 소식을 접한 주인공 의 반응은 이러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소실되어야 했던 작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보기에 그 그림에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혼이 너무 강하고 너무 깊이 배어 있었다물론 훌륭한 그림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불러내는 힘을 지닌 그림이었다. ‘위험한 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 대중의 눈에 드러내는 일은 적절치 못할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그림에서 튀어나온 인물인 기사단장은 에게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일도 무척 많다네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의 의미가 무엇인지이 그림을 대중에 공개할지를 둘러싼 토론 과정에서 나온 발언인데가 결국 기사단장의 이 말에 승복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한국어판 출간 뒤 출판사와 서면 인터뷰에서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라고 밝혔는데이것은 위험한 역사 상대주의 또는 역사 허무주의적 발언으로 들린다. 식민과 침략그리고 학살이라는 가해의 역사에 대한 판단이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일본 우익의 반발을 산 이른바 난징학살”(=소설 속 표현)과 관련해서도, ‘가해자인 일본인 쓰구히코의 트라우마만 부각될 뿐 피해자인 중국인의 처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점은 문제라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예의 서면 인터뷰에서 어떤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쓰인 소설은 대부분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며 이야기(=소설)가 지닌 선량한 힘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다여기서 말하는 선량한 힘은 기사단장 죽이기가 지녔다는 위험한 힘의 상대 개념처럼 읽힌다난징학살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가 불에 타 없어져 마땅한 위험한 작품이라면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세계란 대체 무엇일까. 하루키의 수상쩍은 역사관그리고 그와 짝을 이루는 선량한’ 문학관은 한국 수구 문인들의 순수문학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일본 우익의 하루키 비판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 아닐까.










위 기사에서 좀 짚어보고 싶은 부분을 보라색 처리했다.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라고


 밝혔는데이것은 위험한 역사 상대주의 또는 역사 허무주의적 발언으로 들린다.



기자님이 비판한대로 교묘하게 전쟁 가해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 여지도 있지만, 이렇게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속 또 하나의 피해자로 묘사된 쓰구히코 같은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 상식적으로 없었을리 없다.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의 어떤 전쟁에서 모든 군사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전쟁에 나섰을까?


   국가권력이란 나를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때론 원치않는 싸움을 강요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해자측의 개개인을 모두 같은 색깔로 판단할수는 없지 않을까?


즉, 흑백으로 가린 한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해자쪽에 가해자가 섞여 있을수도 있는거고,


가해자쪽에 피해자가 섞여 있을수도 있는거 아닌가?


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다.


기자님이 불평한대로 난징학살에서 중국인의 처지가 고려되지않고 가해자쪽에 서 있는


쓰구히코만 부각된 것도 이러한 이야기를 좀 더 피력해보고 싶었던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닐런지...


나는 <태극기휘날리며>라는 영화에서 이은주(영신)를 죽인 보도연맹사건을 생각해 봤을때


(* 북한군이 준 양식을 얻어먹은 죄로 빨갱이로 몰려 장동건(이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남측 우익단체에 살해되는 사건이다. 영신은 좌익이나 빨갱이가 아니었다.


   힘없는 국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살해되었던 이 사건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다.)


쓰구히코의 처지를 부각해서 가해자무리속의 또다른 피해자 이야기해 보고싶었던 하루키를


이런식으로 몰아붙이는건 보도연맹을 비판하고 싶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북한군에게


피해를 입은 남한 국민들의 사건을 등한시 한다고 하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난징학살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가 불에 타 없어져 마땅한


위험한 작품이라면그러한 메시지를 담은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세계란 대체 무엇일까.



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은 이거다...라고 한가지 의도로 해석하기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기자님의 해석대로 나치나 일제가 했던 악행을 고발한 작품으로 해석할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나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가(아마다토모히코) 자신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린 작품일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림속의 죽어가는 기사단장이 작가 자신이었고,


 자신을 찌른 젊은이가 동생 쓰구히코가 아니었을까?


 자살을 했던 동생 쓰구히코의 결연한 의지가 기사단장을 찌르는 젊은이의 무표정으로


 표현되었을수도 있을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의 의미가 큰 그림이었다면,


숨기고 싶어하는 작가(아마다토모히코)의 의지는 존중되어야 했다.


이를 무시한채 타인이 마음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지는


누구도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아들인 마사히코에게 전달해서 유족이 판단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러기 전에 화재로 그림이 소실된건 주인공의 판단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그림에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혼이 너무 강하고 너무 깊이 배어 있었다. 물론 훌륭한 그림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불러내는 힘을 지닌 그림이었다. 위험한 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그런 존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 대중의 눈에 드러내는 일은 적절치 못할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불러내는 위험한 힘이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를 뜻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나?





역사에는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게 좋을 일도 무척 많다네.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네. 객관이 주관을 능가한다는 법도 없어. 사실이 망상을 지워버린다는 법도 없고 말일세.”



객관(사실) = 세상 사람들의 판단, 해석


주관(망상) = 작가 아마다 토모히코의 의도



다만, 여기서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법은 없다는 뜻이 뭔지 나는 모르겠다. 











안돌아가는 머리에 기름칠 해가며 PS를 너무 길게 쓴 것 같다.




짧은 소견으로 좋아하는 작가를 변호 한답시고


기자님의 일리있는 지적에


논거 빈약한 딴지를 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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